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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글

형님은 다 어디로 갔는가

by bluegull 2023. 10. 25.

형님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내가 했다”는 똑같은 말
주윤발은 ‘형님’ 추앙받고
한국 고위층은 초라한 이유
강호의 도리는 내다버렸나

 

 

주윤발(周潤發)을 ‘저우룬파’로 적어야 하는 건 마뜩잖은 일이다. 외래어 표기를 위한 어문 규정이라고는 해도, 그가 영화 ‘영웅본색’에서 자주 물고 있던 성냥개비가 실수로 입안에 들어간 것마냥 혓바닥이 영 어색하다. 윤발이 형님, 이렇게 불러야 그제야 나는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내 추억의 일부를 애정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제야 그는 먼 데 사는 나이 든 홍콩 사람이 아니라 강호의 도리를 세우려 쌍권총을 휘두르던 한 남자로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여전히 ‘따거(大哥)’로 불리며 지금껏 뭇 남성들의 낭만적 존경을 받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했다. 현재 기준 약 1조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왜 기부를 결정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남자는 “아내가 했다”고 대답했다. “저는 기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입니다. 액수도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남을 살리는 것. 나는 이것이 ‘형님의 화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했다”는 말, 그러니 내 역할은 크지 않다는 이 축소의 말은 즉각 기억에서 몇 명의 사내를 불러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더 멀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아내가 알아서 했고, 아내가 상의 없이 투자했으며, 아내가 돈을 받은 것이기에 나는 알지 못했다는 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나를 살리는 것. 사람들은 “아내가 했다”“아 내가 했다” 사이의 진실을 손가락질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힘깨나 쓰는 사내들의 화법이라는 사실에 초라함을 느끼면서.

 

 

‘영웅본색’에서 가장 유명한 명대사는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江湖道義現在已經不存在了)일 것이다. 주윤발이 읊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대만 조직 보스가 한탄하듯 내뱉은 말이다. 무뢰배일지언정 그들을 최소한 남자로 살게 했던, 의리라는 최후의 윤리마저 사라졌다는 개탄. 저 대사가 극중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올 때, 주윤발은 “이젠 옳은 길로 가고 싶다”는 단짝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혈혈단신 적진에 쳐들어간다. 의리가 낭만이 돼버린 시대, 누구도 “내가 했다”고 자백하지 않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 영화를 다시 돌려보곤 한다. 영화는 1986년에 제작됐다. 강호의 의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본색은 가장 추울 때 드러난다. 얼마 전 신준호 서울중앙지검 강력범죄수사부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요즘 조폭에 대해 이렇게 촌평했다. “현실에선 돈이 형님이고 의리 이런 건 없다…. 살아야 되니까 형님도 팔고 동생도 판다.”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며 신의를 과시하다가도 목줄이 조여오면 일면식마저 부정하는 몇몇의 ‘스윗 한남(韓男)’을 생각한다. 계속 군림하기 위해 “네가 했다”고 비겁해져야 하는 사정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아 시장님, 의원님, 대표님은 될 수 있을지언정 형님이 될 수는 없다. 한 줌의 권력 덕에 측근에게서조차 끝내 ‘그분’으로 불릴지언정, 결코 ‘따거’로 불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많던 형님은 다 어디로 갔는가. 실속 없이 망가지더라도 끝내 남자의 멋을 보여주던 형님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없어 40년 전 홍콩 영화를 돌려보는 건, 윤발이 형님만 찾는 건 아무래도 마뜩지가 않다.

 

 

글 / 조선일보 칼럼 /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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