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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글

사전투표율 신기록…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by bluegull 2024. 4. 8.

사전투표율 신기록…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사전투표율 신기록 31.28%
“윤 정권 심판하는 민심” 對
“범죄자에게 분노하는 마음”
결국은 결집… 누구 마음 더 클까

 

 

우리는 잘 잊는다. 집단 기억력은 더 허술하다. 2017~2022년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문 전 대통령의 취임사 제목이기도 했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나라에서 줄줄이 겪어냈던 비참지경을 글 쓸 때마다 반복하기도 이젠 지친다. 인상적이고 비유적인 한 문장으로 문 정권의 특징을 요약해놓지 않았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삶은 소대가리, 미친 집값, 울산 선거공작, 이런 말들이 소태처럼 입안을 감돌 뿐이다. 모레 총선 결과에 따라 그 시절로 더 과격하게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잊는다.

 

 

만약 이재명과 조국이 입법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십중팔구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다. 원수를 갚는다, 이 말처럼 사악하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슬로건도 없다. 범죄 혐의자인 그들이 응분의 대가로 치러야 했던 수사와 재판 과정을 탄압과 고난으로 분칠하면서 새 세상을 맞은 팔뚝 완장을 으스댈 것이다. 당장 초여름부터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비롯한 두어 개 특검법 발의, 국정조사 발동, 국무위원 해임안, 탄핵안 발의 그리고 가을쯤 선제적 개헌안을 꺼내려 들 것이다.

 

 

지금껏 그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정권 심판이란 말은 윤석열 정권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겠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원수 갚기다. 심판은 원래 종교적 의미가 먼저다.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이 지상의 악인들을 쓸어버릴 때 심판이라고 한다. 아마겟돈이다.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 우리 정치판에서는 이 심판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2011년 문재인 자서전에는 ‘정치 보복의 먹구름’이란 챕터 제목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후임 이명박 정권의 정치 보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 문재인이 우리 정치판에 걸어놓은 정치 보복이란 주술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다. 이번엔 이재명과 조국이 거기에 올라탔다.

 

 

그들은 국민이 가진 분노의 감정을 선점하고 부추겼다. 윤 정권의 아쉬운 점을 극화해서 분노의 심판이라는 프레임으로 확대재생산했다. 어느 정권이든 평가 받을 부분과 미진한 부분은 함께 존재한다는 점을 잊게 만들었다. 그들은 겁 없이 오만했다. 명품백 스캔들, 이거 하나만 붙잡고 있으면 총선은 치르나 마나라고 떠들었다. 꽃놀이패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특검을 받아들여도 생큐, 거부해도 생큐라고 했다. 그러다 작년 말 한동훈 비대위원장 등판을 계기로 여당에 역대급 컨벤션 효과가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새해 들어 이재명 사당화,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야당 최악의 악재가 여당에 반사 이익을 몰아줬고, 공천 파동은 곧 야당 파탄의 법칙이라도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이후는 잘 아는 스토리다. 여권에서 빌미를 제공한 이종섭 황상무 사건, 의료 사태, 그리고 대파값 구설이 판세를 또 뒤집었는데 막판에 김준혁 양문석 공영운 박은정 같은 야권 후보가 전대미문의 극단적 망언, 위법적 사기 대출, 내로남불 대물림, 40억 전관예우로 국민의 성정에 엄청난 상처를 내면서 우파의 재역전 결집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

 

 

그제 31.28%라는 사전투표율 신기록은 이재명과 조국이 유세장에서 흔들어대고 있는 파우치백과 대파보다는 김·양·공·박이 밑뿌리부터 흔들어버린 공정과 상식의 파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옳다. 민주당은 “윤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성난 민심이 확인됐다”고 했고, 국민의힘은 “우리가 범죄자들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했는데, 민심은 그 어디쯤에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결집이다. 대통령 이승만은 광복을 맞이한 나라로 돌아오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그 말이 무려 80년 뒤에 한동훈의 입에서 이토록 절박하게 되살아날 줄은 몰랐다.

 

 

글 / 조선일보 칼럼 / 김광일 논설위원

 

Lesiem / Justit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