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계약보다 못한 9·19합의…
최소한의 거래 양식도 안갖췄다
얼마 전 사정이 생겨 급히 아파트 월세 계약을 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까다로운 계약 조건에 놀랐다. 두 달 치 월세가 밀리면 임대인이 즉각 계약을 해지하고 퇴거 요청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집 어디에는 못을 박으면 안 되고, 방을 타인에게 세주면 안 되고, 뭐 하면 안 되고, 그럴 경우 어쩔 것이며…. 계약서는 임대인이든 임차인이든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 구체적이다. 각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당연한 것들이었고, 잘 지키면 아무 문제 없는 것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했다.
계약 사항을 어기면 어떻게 할지 정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집 손상 없이 월세를 따박따박 내고 만료일까지 살다 나가려는데, 임대인이 보증금을 안 주겠다고 한다면? 임차인이 제멋대로 방 하나를 대학생에게 별도로 하숙을 준다면? 월세 수개월 치를 안 내놓고도 ‘배 째’라는 식으로 집을 점거한다면? 페널티 조항이 없다면 당하는 쪽은 아무 수도 쓰지 못하고 금전적으로 심정적으로 큰 피해를 볼 것이다. 그 상황이 길어지면 임대인 입장에서는 사실상 집을 빼앗긴 신세가 된다. 그래서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계약은 어느 복덕방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 자식 간에도, 선의 가득한 종교 단체에도 이런 부동산 거래를 하지는 않는다. 불법 증여·거래 등 딴 꿍꿍이가 없는 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최소한의 거래 양식도 갖추지 않은 계약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에서 2018년 9·19 남북 군사 합의라는 이름으로 체결됐다. 군사분계선(MDL)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40㎞밖에 되지 않는데 MDL 기준 20㎞까지는 정찰 비행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MDL에서 평양까지는 140㎞로 훨씬 멀다.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 야당 의원은 “우리는 정찰력이 뛰어나고 북한은 능력이 떨어져 9·19 합의로 손해 본 건 북한”이라고 한다. 예비역 육군 대장은 “궤변”이라며 “그러면 북한은 왜 협상 내내 비행금지구역을 MDL 기준 60㎞까지 더 넓게 하자고 했겠나. 북한이 바보인가?”라고 했다. 북한엔 없고 한미엔 있는 전략 정찰기에 족쇄를 달려고 했다는 게 이치에 맞는다.
문제는 다른 것도 아닌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는 안보 계약을 ‘어길 시 어떻게 하겠다’는 조항도 없이 3개월 만의 졸속 협상으로 체결했다는 것이다. 수페이지에 달하는 합의서엔 ‘평화’ ‘긴장 완화’ ‘민족’과 같은 허울 좋은 말만 가득할 뿐 ‘페널티 조항’은 물론 위반 시 이전 단계로 돌아간다는 ‘스냅백(Snap back)’ 조항도 없다. 그러니 북한은 9·19로 한미군의 손발에 족쇄를 채운 뒤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등 18차례 합의를 위반하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경험해보니 9·19는 월세 계약보다 못했다. 이런 기준 미달 계약을 왜 체결한 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글 / 조선일보 칼럼 / 노석조 기자
6.25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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