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대와 위트컴장군 조형물 나들이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부산 유엔기념공원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에 안장된 유일한 장군으로 6·25전쟁 당시 미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후 대한민국 재건에 헌신했다.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사람’으로 불렸다. 피란민들로 북적이던 부산은 곳곳에 세워진 천막 등으로 인해 화재에 취약했다. 1953년 1월 국제시장 대화재를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부산역전 대화재는 조금씩이나마 재건을 이루며 일상을 회복하던 부산 시민들의 희망을 삼켜버렸다. 위트컴 장군은 모두가 좌절에 빠져있을 때, 미군 창고를 열어 3만 명의 이재민에게 잠을 잘 수 있는 텐트, 의류, 침구류, 식량 등 군수물자를 긴급하게 지원했다. 그는 부산 시민에게 베푼 선행으로 되려 고초를 겪었다. 군수물자를 함부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미국 의회 청문회까지 불려갔다. 하지만 그는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는 말로 미국 의회를 설득했고, 기립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을 받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메리놀병원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예하 부대원의 월급 1%를 헌금하도록 했고, 직접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시내를 활보하며 모금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 장전동에 50만여 평의 부지를 제공받았고, 여기에 건축자재와 공병부대를 지원해 현재의 부산대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 이외에도 주거지 조성, 도로 건설, 고아원 설립 등 전후 부산 재건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그는 전역 이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와 ‘한미재단’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지원했고, 북한지역 미송환병사 유해 발굴에도 힘썼다. 그는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나 ROTC로 임관하여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특히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과 1945년 마닐라상륙작전에서 군수지원을 맡아 전쟁의 승리를 주도했다. 그는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남아 한국인 한묘숙(1927~2017) 여사와 결혼해 고아원을 짓고 전쟁고아 돕기와 미군 유해 발굴에 일생을 바쳤다. 위트컴 장군은 1982년 7월 12일 한국에서 89세의 나이로 영면, 그의 염원대로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고 부인 한묘숙 여사도 2017년 1월 남편의 곁에 묻혔다. |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 이수영
'나의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륜대, 땅뫼산 가을 나들이 (0) | 2023.12.04 |
---|---|
해파랑길 1코스, 오륙도에서 이기대찍고 동생말로 (0) | 2023.12.03 |
남해, 조도와 호도 나들이 (0) | 2023.11.29 |
남해, 겨울로 가는 금산 (0) | 2023.11.29 |
고흥, 우주발사전망대와 조발도전망대 (0) | 2023.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