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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글

늑대가 어린양에게 하는 개소리(bullshit)

by bluegull 2023. 7. 29.

늑대가 어린양에게 하는 개소리(bullshit)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양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어린 양에게 호통을 쳤다. “이 어린놈아! 내가 마실 물을 왜 흐리고 있느냐?” 어린 양은 자기가 물을 마시던 위치와 늑대가 선 곳을 찬찬히 살펴본 후,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저는 하류에 있는데 어떻게 제가 늑대님이 마실 물을 흐릴 수 있나요?”

 

 

늑대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순순히 포기하지 않고, 머리를 굴리더니 다시 호통쳤다. “네 이놈, 어디서 봤다 했더니, 작년에 날 욕하고 도망갔던 그 녀석이로구나!” 어린 양은 기가 막혔다. “저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또 할 말이 없어진 늑대는 잠시 고민 후 외쳤다. “그렇다면 네 형이 날 욕했구나. 그 대가로 널 잡아먹을 테니 원망하지 마라!”

 

 

프랑스의 우화 작가 장 드 라퐁텐이 쓴 ‘늑대와 어린 양’의 내용이다. 늑대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폭력을 정당화하려 든다. 어린 양은 논리적으로 대응하여 상대방 말문을 막는다. 하지만 늑대가 한 말이 거짓임을 폭로해도 소용이 없다.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는 늑대는 또 다른 이상한 소리를 하며 계속 어린 양을 위협한다. 이런 식의 말하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미국의 분석철학자 래리 G.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늑대가 하는 말은 ‘개소리(bullshit)’다. 방금 보신 그소리’. 프랭크퍼트는 1986년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라는 짧은 논문을 펴냄으로써 일상 언어 사용에 대한 철학적 분석의 한 획을 그었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리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영어 단어 ‘bullshit’만 봐도 그렇다. 철학자는 그 안에 포함된 ‘똥(shit)’이라는 단어를 성찰한다. “대변은 설계되거나 수공예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싸거나 누는 것이다.” 개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개소리는 ‘싸지르는’ 것이다. 똥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다.”

 

 

영어 단어를 통한 분석이지만 우리말에서도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가 개소리를 내뱉는다.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짜증을 낸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사람 입에서 공기와 함께 언어를 내뱉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전혀 공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항문에서 나오는 방귀와 다르지 않다.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들이지 않는다. 가끔 거짓말쟁이들도 느끼는 작은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 아무렇게나 내뱉고 되는대로 지껄이면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윤리적으로 더 해롭다. 거짓말은 참과 거짓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을 전제로 하는 반면, 개소리는 그조차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 그것이 프랭크퍼트가 말하는 개소리의 본질이다.

 

 

개소리가 우화 속에만 있다면, 남의 나라 일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현실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그로테스크하다. 지난 6일 국회 대정부 질문 현장을 떠올려 보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불러놓고 야당 의원들이 호통을 치고, 빈정거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째려보았다. 어린 양을 잡아먹을 핑계를 대고 싶은 늑대처럼 안달이 나 있던 그들은 바야흐로 개소리의 향연을 펼친 것이다.

 

 

그중 백미는 국회의원의 말. “장관은 들기름, 참기름 안 먹고 아주까리 기름 먹어요?” 여기서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은 ‘장관이라는 사람이 아주까리 기름을 식용유로 쓴다’고 거짓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뒤이어지는 문답을 보면 분명하다. 당황한 장관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라고 되묻자, 국회의원은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아주까리 기름. 왜 이렇게 깐족대요?” 상대방에 대한 본인의 비호감을 드러내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는, 교과서적 개소리인 셈이다.

 

 

다른국회의원도 그에 질세라 국회의 품격을 높였다.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왕’ 자 쓴 거 알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장관이 “나에게 물어볼 일이냐”고 답하자, 마치 준비했다는 듯 국회의원이 하는 말. “그럼 왕세자가 도대체 누구냐? 세자 책봉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장관 아니겠느냐?” 이런 장면을 보며 라퐁텐의 우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작년에 나를 욕했던 양의 동생 아니냐’고 개소리를 하던 늑대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으니 말이다. 라퐁텐의 우화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어린 양이 잡아먹히는 비극으로 끝난다. 늑대가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를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어린 양은 ‘반격’ 대신 ‘반박’만 하다가 도망갈 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뭇매질하려던 좌파들의 잘못에 대해 한동훈은 일침을 놓는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검찰의 일은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검찰을 가장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범죄자들 뿐이다." 당당하게 주장 히는 한동훈을 보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와 희망을 봤으며 그리고 아낌없는 박수와 성원을 보낸다.  광우병, 사드 전자파 4대강 녹조, 세월호 날조 드루킹 조작 이태원 서양 귀신 놀이 하다 사망한 자들 날조 재미를 이미 보고 계속 보려는 좌파들을 처단해야 이 나라가 산다. 또다시 제목만 바꾼 일본의 오염수 방류로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좌파들의 더러운 냄새 나는 개 소리로 선동과 혼란을 부추기는 입만 열면 거짓말. 정말 뻔뻔한 인간들이다

 

 

개소리를 하며 호시탐탐 때를 노리는 자를 겁낼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 국회에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무언가가 가득 차 있다. 문 활짝 열고 좌파들의 개 거품을 녹여 낼 수 있는 내년 총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원대로 되길 두 손 모아 소망한다.

 

When a Child is Born, Nazareno Cruz and the Wolf, 1974